<혀 아래 날선 진주>유영공간
<Knife-edged Pearls Beneath Your Tongue>
space uooyoung

2021. 11. 4 ~ 2021. 11. 14
Open 12:00PM ~ 19:00P M
이 전시는 거즈라는 부드러운 천이 상처를 감싸듯이, 날카로운 진주를 만드는 아픈 가상의 몸을 감싸 그 스스로가 유사-피부로 태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우리는 다른 이가 느끼는 바를 감각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몸이 피부로 닫힌 존재라고 느끼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소통하기 위해 몸에 여러 구멍을 가지고 있다. 말하기 위한 입, 듣기 위한 귀 등.그런데 임의로 생기는 구멍도 있다.바깥세상과 몸이 마찰을 일으킬 때, 몸에는 상처가 생기며 피부가 열린다.상처로도 우리는 세상과 소통한다.
일련의 작품들은 거즈, 요오드, 파라핀과 같은 상처와 연관된 재료들로 몸 속의 고통을 물질화한다. 요오드는 피와 회복을 동시에 상징한다. 파라핀은 액체 상태일 때는 내상을 치유하고 온도가 식으면 굳는다. 거즈는 이와 같은 재료들로 상처가 생기고 회복되는 과정을 겪는다. 거즈는 피부가, 신체가 겪는 과정을 겪으며 몸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유사-신체가 된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관람객은 거즈를 꿰매 만든 커튼과, 마찬가지로 거즈가 재료이지만 딱딱하게 굳어 잘린 뇌세포, 혹은 뿌리와 같은 형상이 커튼 속에 있는 것을 마주한다. 거즈는 여기서 자신의 존재방식의 가능성이 단 하나가 아니라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즈는 피부가 찢어지고 열렸을 때 그곳에서 피부의 대체물 역할을 한다. 거즈는 피부가 회복을 마치면 버려지는, 임시-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 거즈는 서로 꿰매져 하나의 큰 천을 이루어 공간을 적극적으로 분할한다. 대체물에 불과했던 거즈는 공간을 차지하고 나선다.
또한 그 안에 설치된 거즈 오브제는 자신만의 무대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거즈 천은 에폭시에 담가져 단단하게 굳어진 다음, 중요한 뇌세포 중 하나인 퍼킨지 셀의 모양으로 잘려진다. 퍼킨지 셀은 운동과 인지를 담당하는 소뇌 피질에 위치하는 뇌세포로 다른 뉴런들로부터 정보를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 덴드리틱한(나뭇가지 모양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는 식물이 물을 찾아 땅속을 헤집으며 생겨난 뿌리의 모습과 유사하다. 오브제는 이와 같이 전시에서 첫번째로 자연계의 형상과 인체의 요소를 유사성으로 엮는다.
거즈로 만든 커튼을 지나면 수십개의 명반으로 만들어진 결정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수십 개의 날이 선 “진주”라고 이름 붙여졌다. 조개에게 진주는 모래와 같은 이물질로 생겨난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견뎌낸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 결과인 진주가 날카롭다면, 이것은 상처의 결과물인 동시에 상처의 원인이 된다. 신체에게 상처는 사건이 아닌 상태이다. 신체에 생긴 상처는 외부 원인의 결과이지만, 그 상처는 신체에게 그 순간부터 지속적인 아픔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신체는 자신 그 밖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한다. 외부세계의 모든 것은 잠재적인 상처의 원인이다. 피부 아래 박힌 ‘진주’는 상처를 망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투명한 결정체들 중 몇몇은 중앙에 짙은 호박색의 내포물을 품고 있다. 이는 과포화 명반 용액에 요오드를 섞어 결정을 기른 것이다. 뜨거운 물에 포비돈 요오드를 섞으면, 요오드는 마치 혈액이 응고하는 것처럼, 찐득한 덩어리로 변한다. 이 혈전 조각을 품은 명반 결정 조각은 마치 피를, 상처를 그 안에 묻은 것 같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진주가 처한 상태이다. 이 진주들은 피부 아래 박혀 있지 않고, 몸 밖으로 꺼내져 작은 단상 위에 올라가 있다. 결정의 크기는 결정이 자라는 데 걸린 시간으로 치환될 수 있고 결정이 자라는 데 걸린 시간은 고통의 시간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것은 몸 밖으로 나와 단상 위에 올려져 전시되고 있다. 비정형적인 진주들의 모양은 각자 고유한 고통의 시간들을 나타낸다. 모양도 크기도 비균질적인 진주들은 제단 위에 서서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고통의 시간을 자랑스러워 하듯이, 그리고 타인의 고통 또한 흡수할 수 있다는 듯이.
투명한 결정체들 중 몇몇은 중앙에 짙은 호박색의 내포물을 품고 있다. 이는 과포화 명반 용액에 요오드를 섞어 결정을 기른 것이다. 뜨거운 물에 포비돈 요오드를 섞으면, 요오드는 마치 혈액이 응고하는 것처럼, 찐득한 덩어리로 변한다. 이 혈전 조각을 품은 명반 결정 조각은 마치 피를, 상처를 그 안에 묻은 것 같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진주가 처한 상태이다. 이 진주들은 피부 아래 박혀 있지 않고, 몸 밖으로 꺼내져 작은 단상 위에 올라가 있다. 결정의 크기는 결정이 자라는 데 걸린 시간으로 치환될 수 있고 결정이 자라는 데 걸린 시간은 고통의 시간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것은 몸 밖으로 나와 단상 위에 올려져 전시되고 있다. 비정형적인 진주들의 모양은 각자 고유한 고통의 시간들을 나타낸다. 모양도 크기도 비균질적인 진주들은 제단 위에 서서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고통의 시간을 자랑스러워 하듯이, 그리고 타인의 고통 또한 흡수할 수 있다는 듯이.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지만 그 안에서 서로 상이한 모습을 가진 것은 파라핀-석판들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파라핀 판에는 배하나의 시구가 비명처럼 각인되어 있다. 파라핀은 융점이 최고 66도로서 낮은 온도에서 녹는 편이다. 따라서 파라핀은 액체 상태에서 내상을 치유하는 용도로 쓰인다. 내상을 치유하다가 식어 굳은 파라핀은 신체의 고통을 끄집어내어 그 안에 보존한다. 시는 천에 쓰여진 후 파라핀이 녹았을 때 그 위에 올려진 후 떠오르기도, 가라앉기도 하다가 굳어 파라핀 석판과 하나가 되었다. 시들은 각각의 상이한 상처를 표현하고 있으며, 파라핀은 그것을 담는 몸체가 되었다.
파라핀 석판의 뒷면을 보면 파라핀 판이 덴드리틱한 균열이 나 있는 것을 보인다. 파라핀의 두께가 두껍기에, 그 틀에서 판을 꺼낼 때 불가피하게 판 내부에 균열이 난다. 깨지면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균열은 판마다 서로 상이하다. 파라핀 석판들은 엄격한 규칙을 따르며 행과 열로 배치되어 통일성을 지니지만, 그것들은 서로 분명히 구분되는 다른 아픔을 품고 있다.
파라핀 석판이 있는 방에서 뒤를 돌아보면, 수의와 관이 있다. 두 작업 모두 요오드에 적셔진 후 마른 거즈 천을 사용한 것이다. 요오드 용액은 피의 은유이지만, 동시에 상처를 소독하는 소독약이기도 하다. 관으로 만들어진 천은 요오드 용액을 그대로 머금은 채 굳어졌다. 거즈 천은 에폭시로 굳혀진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유리섬유가 그 위에 올려지고 녹으며 더욱 단단해져 외골격을 가진 양 스스로 서게 되었다. 상처의 원인이 되는 차갑고 딱딱한 유리는 여기서 반어적으로 환부를 감싸며 골격을 가질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유리섬유로 감싸진 거즈는 세워지고, 상처는 신체가 된다.
두 관은 각기 다른 높이와 너비로 이루어져 있다. 상처란 산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죽음 후에 생긴 외상은 상처라고, 아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한 이 관들은 누워 있지 않고 서 있다. 〈Paar〉에서 두 관은 항상 죽음의 가능성에 있으나 살아있는 상태인 신체를 은유한다. 그리고 이들은 동질하나 개별적이며, 혼자가 아니라 둘이다. 둘은 손을 맞잡고 있지도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으나 함께하고 있다.
두 관은 각기 다른 높이와 너비로 이루어져 있다. 상처란 산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죽음 후에 생긴 외상은 상처라고, 아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한 이 관들은 누워 있지 않고 서 있다. 〈Paar〉에서 두 관은 항상 죽음의 가능성에 있으나 살아있는 상태인 신체를 은유한다. 그리고 이들은 동질하나 개별적이며, 혼자가 아니라 둘이다. 둘은 손을 맞잡고 있지도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으나 함께하고 있다.
〈수의〉에서 피부의 대체물이던 거즈는 신체의 외피를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옷이 된다. 그리고 옷으로써 기능하고 난 후, (입혀진 후) 씻겨져 흡수한 요오드 용액을 모두 뱉어냈다. 거즈는 피를 머금으며 유사-피부의 형태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모든 피부는 태어나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상처를 겪고 또 회복된다. 물로 요오드 용액이 거즈 천으로부터 씻겨지면서 상처 역시 씻겨져 나갔다. 그러나 물로 씻어낸 상처와 피라고 해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흔적이 미미할지라도, 요오드 용액이 한때 그것을 적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즈는 상처의 발생과 회복의 과정을 겪어 원래 흰색으로 돌아가며 더더욱 교묘히 피부를 모방한다.
제아무리 교묘히 모방할지라도, 거즈는 피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거즈는 일련의 피부가 겪는 그것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 ‘비슷한 무언가’가 되었다. 흰 거즈에서 흰 거즈로 돌아가는 전시의 배치는, 상처의 탄생과 죽음을, 아픔의 발생과 회복을 이야기한다.
본 전시에서 작품들은 반복해서 고통을 물질화하고 있다. 다른 이와 공유될 수 없는 감각을 끄집어내어 파라핀, 거즈, 결정과 같은 물질에 가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밖의 감각을 이해하길 거부하는 신체의 아집 때문에,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 곳곳의 상처의 흔적을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해소해줄 수 있으려면, 먼저 그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낯선 고통을 나의 피부라는 경계선 안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눈먼 공감의 연속이, 나의 몸과 다른 몸들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