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is, Idit>
2020 홍익대학교 졸업전시 2020 Hongik University Graduation show

공간 속에 두 개의 상이한 공간이 있다. 하나는 탑, 하나는 커튼이다. 그러나 탑을 이루고 있는 나무 프레임도, 커튼을 이루고 있는 거즈를 이어 꿰맨 천도 견고한 벽은 아니다. 투명한 아크릴과 안이 비쳐 보이는 천은 어느 정도의 투과를 허락하는 막과 같은 존재이다.
<소금기둥>, 2020
〈소금기둥〉은 밖으로 꺼내진 눈이다. 고통을 향한 타자의 시선은 어렵다. 고통스러워하는 타자에게 우리는 어떤 시선을 던져야 할까,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을 돌리는 것은 자비인가 이기심인가? 시선의 힘은 막강해 이리트의 몸을 소금기둥으로 굳혀 버렸다. 〈소금기둥〉의 망막에 맺힌 상들은 고통을 목격하는 사형 증인실들의 방이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적인 고통의 이미지는 없다. 다만 그곳에 앉아 조용히 사형 집행이라는 의식을 목격했던, 그리고 목격할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하게 할 뿐이다. 〈소금기둥〉은 폭력적인 시선을 암시하는 판옵티콘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곳에서 모든 곳을 바라보는 1인칭 시점은 21개의 분산된 시선으로 파편화된다. 시선들은, 눈과 망막은, 보이지 않는 몸이라는 막강한 권좌에서 내려와, 서로서로 엮어 탑을 쌓은 후 관람객을 바라본다.
〈소금기둥〉은 21개의 회화를 담고 있는 프레임으로 쌓은 탑이다. 투명한 아크릴 프레임 속에 들어 있는 회화는 앞면에는 미국 사형장의 증인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뒷면에는 검은 칠이 되어 있다. 그림은 관람객을 등진다. 회화의 뒷면은 탑을 검은 벽처럼 보이게 한다. 관람객이 〈소금기둥〉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그림은 관람객을 향하고 있다.
형의 집행을 목격하는 증인들은 유리 너머로 한 죄수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것은 아마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가장 극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실제적인 경험일 것이다. 피부라는 신체의 최전선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던 타인의 고통의 경험은 유리 벽을 뚫고 밀려와 공통의 경험으로써 모두의 몸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고통의 순간은 증인들의 몸 위에 ‘새겨진다.’ 마치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때 필름 입자에 이미지가 ‘새겨지는’ 것처럼. 고통의 이미지는 증인들을 바라본다.
구약성경에는 룻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칭했던 룻의 가족이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때, 룻의 아내는 죄 많은 도시를 뒤돌아보았고, 그 결과 소금기둥이 되었다. 성경에 이름조차 기재되지 않은 룻의 아내는 이리트, 혹은 이디트라고 불린다. '이리트'의 뒤돌아봄을 성경은 타락한 도시에 대한 미련, 곧 죄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한편 연민의 시선이다.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그것을 직면하고 목격자가 되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그런 괴로움은 그를 소금기둥으로 만들었다. 영원히 고통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순교자가 된 것이다.
투명한 아크릴 판 사이에 있는 그림은 망막에 맺힌 상을 닮았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때 가능하다. 우리의 감각 중 ‘봄’은 가장 멀리 떨어진 것까지 인식할 수 있다. 내 바로 앞에 있는 것부터, 매체를 통하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지고, 촉감을 느끼는 것은 대상이 우리 몸으로 가까이 다가와야, 그리고 내가 대상으로 다가가야만 가능하다. 예컨대,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촉각의 영역까지 허락하는 것은 극히 적다. 우리가 다치고, 찔리고, 상처 입는 것을 감수하고 바깥 세계에 몸을 노출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몸과 함께 시선은 숨고, 숨는다. 시선은 멀리 갈수록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을 하늘 위에서 조감한다면, 더 많이, 더 멀리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 시끄러운 소리, 부딪히고 찢기는 어떤 마찰과도 멀어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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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집행을 목격하는 증인들은 유리 너머로 한 죄수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것은 아마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가장 극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실제적인 경험일 것이다. 피부라는 신체의 최전선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던 타인의 고통의 경험은 유리 벽을 뚫고 밀려와 공통의 경험으로써 모두의 몸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고통의 순간은 증인들의 몸 위에 ‘새겨진다.’ 마치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때 필름 입자에 이미지가 ‘새겨지는’ 것처럼. 고통의 이미지는 증인들을 바라본다.
구약성경에는 룻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칭했던 룻의 가족이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때, 룻의 아내는 죄 많은 도시를 뒤돌아보았고, 그 결과 소금기둥이 되었다. 성경에 이름조차 기재되지 않은 룻의 아내는 이리트, 혹은 이디트라고 불린다. '이리트'의 뒤돌아봄을 성경은 타락한 도시에 대한 미련, 곧 죄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한편 연민의 시선이다.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그것을 직면하고 목격자가 되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그런 괴로움은 그를 소금기둥으로 만들었다. 영원히 고통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순교자가 된 것이다.
투명한 아크릴 판 사이에 있는 그림은 망막에 맺힌 상을 닮았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때 가능하다. 우리의 감각 중 ‘봄’은 가장 멀리 떨어진 것까지 인식할 수 있다. 내 바로 앞에 있는 것부터, 매체를 통하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지고, 촉감을 느끼는 것은 대상이 우리 몸으로 가까이 다가와야, 그리고 내가 대상으로 다가가야만 가능하다. 예컨대,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촉각의 영역까지 허락하는 것은 극히 적다. 우리가 다치고, 찔리고, 상처 입는 것을 감수하고 바깥 세계에 몸을 노출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몸과 함께 시선은 숨고, 숨는다. 시선은 멀리 갈수록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을 하늘 위에서 조감한다면, 더 많이, 더 멀리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 시끄러운 소리, 부딪히고 찢기는 어떤 마찰과도 멀어진 채로.





반대편의 〈피부의 아래와 상처의 바깥〉은 병원 다인실의 커튼 모양을 모방하고 있다. 커튼은 환부에 올려져 피부의 대체재 역할을 하는 거즈를 손으로 꿰맨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 거즈로 이뤄진 천 중간중간에는 얇은 종이에 수채화로 그린 피부의 이미지가 함께 꿰매어져 있다. 손으로 꿰맨 손바늘 자국과 실밥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거즈 천은 그 자체로 촉각적인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거즈로 만들어진 공간은 마치 닫힌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으로써의 몸을 은유하는 듯하다.

〈피부의 아래와 상처의 바깥〉 2020, 거즈, 종이에 수채화, 가변설치
거즈-막은 공간 속에 놓여 일정한 부피와 면적을 차지함으로써 그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거즈-막은 견고한 벽이 아니며, 거즈-막 속의 공간도 독립된 방이 아니다. 병원의 가림막 커튼은 환자들에게 어느 정도 사생활을 보장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벽의 기능은 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커튼을 걷는 순간, 독립된 공간은 쉽게 허물어진다.
피부는 완성된 보호막이 아니다. 피하의 공간은 낯선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적으로 빈 공간이다. 타자의 경험은 내 피부 안으로 스며들어 올 수 있고, 내 경험은 타자의 피부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 몸은 결코 완성되지 않지만, 몸들은 서로를 완성시킨다.
〈소금기둥〉과 〈피부의 아래와 상처의 바깥〉은 투과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선에 의해, 사건을 목격함에 의해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는 투과와, 거즈라는 물질을 통해 피하의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촉각적인 투과의 이야기이다. 두 가지 이야기는, 두 개의 공간은 피부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감각을 받아들인다는 어려운 과제에 대한 대답의 시도이다.